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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닥일기 49 ( 의사 아버지와 딸 )나의 이야기 2010. 12. 29. 10:51
지난 여름은 긴 장마로 시작되어 예년과 다른 조금 이상한 여름이었습니다.
날씨를 닮아서 그런지 나에게도 지난 여름은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참 힘들었던 여름이었습니다.
봄부터 이번 여름 휴가는 오래간만에 미국에 있는 식구를 만나 같이 미국여행을 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그랜드 캐년, 자이언 캐년에 있는 모텔도 미리 예약을 하고, 여정도 꼼꼼히 챙기고,
국제 운전면허증도 미리 만들어 놓았는데 어느 날 모든 계획이 다 바뀌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아내가 갑자기 전화를 했습니다.
< xx이가 오늘 병원에 갔는데...... 난소에 혹이 있데..... >
< !!! >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기분입니다.
미국에 있는 큰 딸이 수개월전부터 아래 배가 불편해서 오늘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했는데
아래 배에 혹이 있답니다.
수년을 혼자 자취를 하며 버클리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이번에 대학을 졸업하는 큰 딸인데
너무 놀라운 소식입니다.
< 내일 부인과 의사를 만나기로 했다는데 괜찮을까? >
< .... 괜찮겠지..... 크지 않으면 그냥 없어지기도 하는데 뭐..... >
걱정이 많은 아내를 안심시키려고 나는 애써 괜찮다고 했지만 가슴은 마구 떨리고 있습니다.
< 크데.... 10센치가 넘는다는데...... >
< .............. >
....... 내가 떨고 있는 것이 아닐까?..
....... 내가 떨면 안 되는데.......
담대하게 이야기를 하려고 해도 자꾸 마음이 떨립니다.
< 내가 오늘 밤에 버클리로 갈 생각이야. >
< ...그래? ... 힘들텐데... >
차로 6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아내가 이 밤에 운전을 해서 가겠다고 합니다.
아이도 걱정이지만 밤새 운전을 하고 가야하는 아내도 걱정입니다.
< 그냥 두지 그래. 어린 아이도 아닌데....... >
나는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지만 아내는 가겠다고 했습니다.
그 마음을 내가 모를 리가 없습니다.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전화를 끊고 아무리 마음을 안정시키려 해도 안정이 되지를 않습니다.
<... 괜찮을까? 혹시 암이라면.......아냐. 그럴 리가 없지..... 아직 어린데...>
병원에 근무하면서 안 좋은 환자를 많이 보아서 그런지 자꾸 두려운 생각이 들고 걱정이 앞섭니다.
애써 방정맞은 생각을 지우려고 해도 자꾸 안 좋은 생각만 나서 마음이 안정이 안 됩니다.
다음 날 찾아간 부인과 의사는 어제 본 의사보다 딸의 혹이 더 크다고 한답니다.
전화를 받고 있는 내 등 뒤로 식은 땀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 그래? .........수술을 해야겠구나....... >
안 그런 척하려고 애를 쓰는데 자꾸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똑같은 환자를 참 많이 보았고 그런 수술도 수없이 했는데 이제 의사의 입장이 아니라
보호자의 입장이 되어 보니 너무 당황스럽습니다.
정말 아무 감정없이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간단하게 결정을 내리고 수술을 했었는데.....
< 어쩌지? ....>
아내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참 멀리 들리는 느낌입니다.
꿈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라면 참 좋겠는데.....
< 여기는 마땅히 몸조리할 곳도 없고... 집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그럼 또 다른 의사를 만나야 하고..
어떤 의사를 만날지도 모르잖아.>
< ............. >
< 여기 의사는 복강경으로 수술을 할 생각인데 혹이 커서 다른 의사는 그냥 개복 수술을 하자고
할 수도 있다는데.... >
< .............. >
참 난감합니다.
가족이 멀리 있다는 것이 이럴 때는 참 힘든 일 인 것 같습니다.
< 한국으로 나갈까? ...... 자기 친구에게 한 번 알아 보는 게 어때?...... >
< !! >
안개가 자욱한 것처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눈앞에 무엇인가 작은 불빛이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 ........ 그래. 이리 오라고 하면 되겠구나.... >
마침 아이가 일주일 후면 모든 학교 일이 끝납니다.
어차피 지금까지 쓰던 숙소를 곧 비워 주어야 하고 딸은 이제 직장을 구해 새로운 삶을 살아야합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경험이 많은 친구에게 수술을 맡기면 수술 후에도 편히 쉬면서
그동안 공부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랠 수도 있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 일없이 수술만 잘 끝난다면 이곳이 편한 마음으로 쉴 수도 있고 자세한 수술 경과도 친구에게
들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인의 손재주는 탁월하여 한국 의사들의 수술 실력은 이미 세계적인 수준에 와 있으니까요.
큰 갈등없이 한국에 와서 수술을 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고 우선 수술을 맡아 줄 친구를 찾았습니다.
이 분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친구들이라 우선 교통이 편리한 찬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 누군데? >
나의 설명을 듣고 친구는 우선 환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 잘 아는 사람이야. >
내 딸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혹시 친구가 정에 이끌려 객관적인 판단을 하지 못 할 것 같아
그냥 잘 아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끈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단단한 끈을 잡아야 하고 줄을 잘 서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잘 못된 부분을 나타내는 말 중에 하나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줄을 잘 서서 또는 단단한 끈을 잡아서 앞길이 잘 풀리는 경우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학은 다릅니다.
가끔 잘 아는 사람이라고 또는 특별한 사람이라고 더 신경을 쓰다 보면 오히려 나쁜 결과를 얻는
경우도 보았고 나 자신도 누구의 부탁을 들으면 더 부담이 되어서 과잉 치료를 하게 됩니다.
의사가 무리하게 잘하려고 애를 쓰다보면 더 안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의사가 마음 편하게 환자를 보는 것이 환자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지고 오는 것이지요.
< 복강경으로 할 수 있을까? >
우선 친구에게 수술 흉터가 적은 복강경 수술의 가능성을 물어보았습니다.
< 글쎄........ 너무 큰 것 같은데..... >
아직 미혼인 딸이라 흉터가 안 생기게 복강경으로 했으면 좋겠는데 친구는 망설이고 있습니다.
< 크기도 크지만 물혹이 아니라서 조직검사도 해보아야 하잖아.........
혹시 암 조직이 있다면 조직을 조각 조각내는 것이 위험할 것 같은데.....>
< ........... >
< 그냥 개복 수술을 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 >
< ..............그럴까?...... >
친구의 객관적인 판단이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내 딸은 복강경으로 해주고 싶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딸의 배에 수술 자국이 남게 하는 것은 피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환자가 미국에 있는 내 딸이라고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 그래?.... 걱정이 많겠구나. >
< 응. 조금......>
< 가서 데리고 와!....... 내가 해 줄게. >
친구의 속시원한 대답이 고마웠습니다.
자신있게 내가 해줄 터이니 가서 딸을 데리고 오라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조금 마음이 놓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여름계획은 모두 취소되고 아내와 같이 미국에 있는 온 가족이 지난 달 중순
귀국을 했습니다.
어차피 내가 가는 동안 가족들이 같이 여행을 하려고 휴가를 맞추어 놓은 것이라 딸 덕분에(?)
몇 년 만에 온 가족이 한국에서 만났습니다.
새벽에 도착하는 가족을 마중하려고 전날 큰 차를 렌트하여 밤새 고속도로를 달려서
인천공항으로 갔습니다.
서울 톨게이트를 지나 한쪽 구석에서 잠시 쉬고 있는 트럭들 사이에 나도 차를 세우고
잠시 곤한 잠을 잤습니다.
나는 비행기 도착 시간에 맞추어 부지런히 공항에 갔는데 생각보다 일찍 비행기가 도착을 하였습니다.
< 아빠! 어디야? ..... 우리 도착해서 벌써 나왔는데... >
전화기로 딸의 목소리를 들으니 기쁘기도 하지만 걱정이 됩니다.
나는 약점이 참 많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얼굴 표정입니다.
나는 나의 감정을 속이지 못 하고 그대로 얼굴에 나타내고 맙니다.
싫은 것을 좋은 척 못 하고 걱정이 있으면서도 태연한 척을 못 합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척 불안하고 두려운데 이 마음을 식구들이 눈치를 채면 어쩌나? .........
........마음속에 걱정과 두려움이 많을 것 같은 딸이나 아내가 내 얼굴을 보고 어두운 그늘을
느끼면 안 되는데......
열심히 표정 관리를 하며 출구를 향해 가는데 저쪽에 아내와 아이들이 보입니다.
내가 먼저 본 것인지 아이들이 먼저 나를 본 것인지 모르겠지만 식구들을 보는 순간,
내 표정이 다시 굳어집니다.
아이들이 < 아빠! >하며 반가와 하는데 나는 환한 웃음이 안 나옵니다.
얼굴을 돌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반갑게 웃어야 하는데.....
어색한 웃음이 되는 것 같아 얼굴을 바로 들 수가 없었습니다.
다행이 식구는 모두 건강하고 맑은 얼굴들입니다.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나는 자주 얼굴을 돌렸습니다.
다음날 친구를 병원 외래에서 만나기 전에 초음파 검사를 먼저 하라는 담당 간호사의 지시로
다시 검사를 했습니다.
친구의 진찰실에 들어가 친구와 같이 검사 결과를 보는 마음이 무척 떨립니다.
< ............ 하나가 아니고 두 개다.......... 하나는 많이 큰데.......... >
컴퓨터 화면을 보며 신중히 이야기하는 친구앞에 앉아 있는 것이 마치 법정에 서서 판사의 판결을
받는 기분입니다.
....... 그래도 친구는 이제 수술날자를 잡자고 하겠지.....
...... 이 분야에서는 우리나라에서도 꽤 알아주는 사람인데.....
나는 친구의 지식과 경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수술 스케줄을 잡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는 조금 망설이는 것 같았습니다.
< 박 oo 교수에게 한번 의뢰를 해보는 것이 좋겠다. >
< !! >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습니다.
........친구가 수술을 피한다면..............
...... 더구나 부인암을 전문하는 교수에게 다시 의뢰를 하자고 한다면......
지금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는 바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집니다.
........ 안 되는데............
....... 그럼 안 되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빠집니다.
< ...... 그래야겠니?...... >
< 응. >
친구는 내 앞에서 직접 박 교수님에게 전화를 해서 특별히 딸아이를 부탁하고 내일 오후에
외래 진료 예약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더 필요한 검사를 내일 아침에 할 수있게 예약을 하는 동안 나는 그냥 아무 생각없이
앉아있었습니다.
무엇에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이 아무 생각도 안 납니다.
그래서 내일 다시 병원으로 오기로 했고 친구가 사주는 점심을 같이 먹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모든 것이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 같을 뿐입니다.
다음 날 다시 병원으로 가서 교수님께 진찰을 받고 수술 스케줄을 잡아 수술을 하는 날까지
내 머리 속에는 안 좋은 생각만 있습니다.
....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대부분 무사한 것인데 뭐....
다짐하고 다짐하지만 자꾸 안 좋은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내가 부인과 의사가 아니라면 더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하필이면.......
경험이 많은 친구가 수술을 피하는 것이 무척 신경이 쓰입니다.
왜 수술을 피하는 것일까?
자기가 수술을 하겠다고 딸을 데리고 오라고 속 시원하게 말하던 친구가.....
검사 상에서 무엇인가 나에게 말 못 할 것을 본 것은 아닐까?
혼자 걱정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려고 하나 나의 약점인 표정 관리과 나를 괴롭힙니다.
수술을 하는 날 아침 일찍 입원실에서 수술실에 들어가기를 기다리는 시간과 수술을 하는 동안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참 길었습니다.
오래 전 아내가 제왕절개 수술을 받을 때는 이렇게 걱정이 되지를 않았었습니다.
제왕절개 수술은 출혈이 가장 큰 문제이지만 대학병원에서 피를 준비하고 노련한 의사들이
많은 상태라서 얼마든지 응급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이라 큰 걱정이 되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가 모르고 있는 동안 이미 만들어진 상황이 이제 밝혀지는 것이라 그 결과가
두렵습니다.
수술이 시작된 직후는 수술방 문이 열릴 때마다 간호사가 나를 부를 것 같아 무척 가슴이
조마조마했습니다.
수술을 시작하고 빠른 시간 안에 보호자를 찾는 것은 대부분 환자에게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무사히 수술이 진행되고 있으면 보호자를 찾지 않는 것이지요.
다행이 1시간이 무사히 지나고 나니 조금 마음이 놓입니다.
< 아무 문제 없이 수술은 잘되고 있나보다. >
옆에 있는 아내에게 조용히 말을 했습니다.
< ?????? >
< 빨리 보호자를 부르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이거든..... >
< 그래. 잘되고 있겠지. >
< 지금쯤 중요한 부분은 다 끝나고 아마 마무리를 하고 있을 거야. >
아내도 내색은 안 했지만 속으로는 계속 기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니까요.
그리고 조금 시간이 더 지난 후 수술방 간호사가 나를 불렀습니다.
마스크를 썼지만 오래 전에 보았던 교수님의 모습을 감으로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 바쁜데 직접 올라왔군. >
꾸벅 인사를 하며 달려가는 나를 보시고 교수님이 웃으십니다.
< 그럼요. 내 딸의 일인데요. >
< 그래?.. 하. 하. 하. >
환한 교수님의 모습을 보니 우선 안심이 됩니다.
< 조직검사 결과를 보아야 하겠지만 특별한 일이야 어디 있겠어? 아직 나이가 있는데.... >
<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교수님께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오는 마음이 너무 가볍습니다.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은 듯합니다.
그리고 딸은 4일 만에 무사히 너무 건강하게 집으로 왔습니다.
이제 몸조리만 하면 됩니다.
개복 수술이 아니라 상처도 없고 바로 잘 걸어다니는 것이 마치 수술을 하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
너무 힘들었던 지난 여름의 이야기입니다.
제 삼자의 입장에서 환자를 보다가 처음 환자의 입장에서 병원을 가보았습니다.
좀 더 일찍 이런 경험을 했다면 더 나은 의사로 살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내가 그동안 환자의 마음을 참 몰랐었구나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남이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것이 참 괴로운 일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한 시대를 이끌어가는 지식인의 외로움은 더 하겠지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아는 자의 외침.
그리고 앞서 가는 자의 고독과 고난.
이 시대를 살아가며 내가 남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비판하기 전에 먼저 그들을 이해하려 애써야할
이유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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